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라르 울리에 (문단 편집) === 아스톤 빌라 === [[파일:external/www1.pictures.zimbio.com/Aston+Villa+v+Newcastle+United+Premier+League+Z90CZgE2gy_l.jpg]] 2010년 8월, [[아스톤 빌라 FC]]는 [[마틴 오닐]]을 경질한 뒤 울리에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초반부터 잡음을 겪어야 했다.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프랑스 축구 협회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에[* 당시 울리에는 프랑스축구협회의 기술고문으로 재직중이었다. 한국행이 불발된 이유도 이 탓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할 수 없었다. 울리에는 9월 15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야 비로소 팀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 아그본라허]], [[스틸리얀 페트로프]], 나이젤 리오-코커, 그리고 [[에밀 헤스키]]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이 모조리 부상당하고 만 것이다. 이 여파로 울리에는 아스톤 빌라 부임 이래 10경기를 치루는 동안 단 한 경기만 이기는 부진을 겪는다. 2010년 11월, 울리에는 이 초유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아스날의 미드필더였던 37세의 노장 [[로베르 피레스]]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2011년 1월에 20경기를 치루는 동안 고작 승점 21점을 기록하는 부진에 시달렸다. 빌라는 18위에 머무르며 강등을 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팬들은 팀의 부진에 화가 나 울리에를 향해 "넌 아침에 해고되어 있을 거다"는 야유를 퍼부었다. 울리에는 1월 이적 시장 때 팀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토트넘 핫스퍼로부터 수비수 [[카일 워커]]를 임대하고 선더랜드로부터 공격수 [[대런 벤트]]를 영입했으며 리옹으로부터 장 마쿤을 영입하고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부터 마이클 브래들리를 영입했다. 2011년 2월, 아스톤 빌라는 9경기에서 5경기를 이기고 3경기를 비기며 12위로 상승하며 영입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3월 초순, 울리에는 맨시티와의 FA컵 경기때 주전 선수들을 대거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팀은 맨시티에게 3:0으로 패했다. 언론은 경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울리에를 거세게 비난했다. 또한 이 시기 빌라의 주전 수비스 제임스 콜린스와 리차드 던이 클럽 스탭과 싸우는 일이 벌어져 팀의 상승세에 찬물을 뿌리고 만다. [[파일:external/i3.mirror.co.uk/aston-villa-main-256832578.jpg]] 3월 19일, 아스톤 빌라는 홈에서 지역 라이벌인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맞붙었다. 이때 팬들은 "이젠 충분하다. 울리에는 나가라!"라는 배너를 들어올리며 울리에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울버햄튼은 이날 맷 자비스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31년 만에 거둔 것이었다.(...) 이 경기 직후, 팬들은 울리에를 향해 "우리는 울리에가 나가는 걸 원한다.", "우리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4월 20일, 팀의 부진과 팬들의 야유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울리에는 밤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는 의사로부터 더이상 감독직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를 대신해서 게리 맥칼리스터 수석코치가 잔여 경기를 치러야 했다. 6월 1일, 울리에는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지옥과도 같았던 아스톤 빌라에서의 1년을 마무리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